한국전쟁에 참여한 호주군
제1차 세계대전
호주는 대영제국의 일부로써,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과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호주에서 전쟁을 지원한 인원수는 총 41만 명이었는데, 사실 1918년까지 호주의 인구수가 5백만 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실로 놀라운 수치였습니다. 이 중 약 33만 명이 해외에서 복무를 하며, 영국군을 지원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약 6만 명의 사망자와 2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전쟁이 처음 일어났을 당시 남태평양에서 독일군을 물리치기 위한 상륙작전에 참전한 결과였습니다. 호주는 영국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정치, 경제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고용방식과 산업의 패턴이 바뀌었으며, 영국에서 조달하기 어려운 전투용품을 대체생산하여 보내주게 됩니다. 전쟁용품에 대한 제조산업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업률은 7퍼센트 이상을 유지하였습니다. 따라서 호주의 경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대체적으로 이 기간 동안 큰 성장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호주의 분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영국이 또다시 독일에 대해 전쟁을 하겠다고 말했을 때, 호주는 영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39년 호주군이 중동으로 파견되었을 때, 호주의 왕립공군은 규모를 키워 영국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게 됩니다. 마침내 호주와 영국의 군대는 호주의 북동쪽에 위치한 섬에서 일본군을 무력화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호주의 본토가 침략을 당한 적은 없지만, 실질적으로 총 96번의 외국군의 공습을 받았으며, 이때마다 호주의 해군, 육군, 공군 부대가 큰 활약을 펼쳤습니다. 그간 호주에서는 총 70만 명의 사람들이 약 6년 동안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사상자는 약 7만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3천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약 2천5백 명 정도가 실종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3만 명 정도가 외국군의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 가운데 약 8천 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국 전쟁에 참여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호주는 영국보다 미국과 더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됩니다. 호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외교 정책은 바로 안 보였는데, 호주군은 유엔의 소속이 되어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또다시 한국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1951년 호주, 뉴질랜드, 미국 세 나라가 안보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서로의 안전을 위해 힘쓰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또한 3년이 지난 1954년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비슷한 동남아시아조약기구를 설립하는데 호주가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도 호주가 참전을 하게 되는데, 1965년에서 1971년까지 미국군을 돕기 위해 베트남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됩니다. 이후 1990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미국군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병시키고, 이라크 해군을 봉쇄시키기 위해 약 3척의 배를 지원하게 됩니다. 더 이상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지 못하게 노력한 것입니다. 2001년에는 미국에 911 테러가 일어났었는데, 호주는 직접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내어 미군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호주의 노력을 보고 미국은 아직도 변함없는 우정과 호의를 보이며, 호주에게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보상을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한적인 이민정책
사실 호주는 영국과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을 선호했지, 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이는 차별적인 이민정책을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는데, 이후 화이트 호주 정책을 발표하여, 문화적, 인종적 차별을 낮추기 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1965년에 발표된 이 정책으로 인해, 전문직 아시아 계통의 이민자들에게 이민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호주는 이라크,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과 같은 나라에 온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어 상당한 개편이 필요할 듯 보입니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호주는 굉장히 다문화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호주인구 가운데 4명 중 1명이 외국 출신이라고 합니다.